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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12월23일 13시30분 5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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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2「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된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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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1868년 11월 메이지 정부의 최고 통치기관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은 외무성에 조선의 사정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는 일본이 조선과의 국교 교섭을 시작하고 정한론(征韓論)이 확산하는 시기여서 조선에 대한 내탐은 반드시 필요했다. 

 태정관이 내탐을 하기 10개월 전인 1월 14일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국교 교섭을 위한 서계를 보냈으나 조선 정부는 격식에 맞지 않는 표현이 있다며 거부했다.  조선이 서계를 거부하자 일본 내에서는 날조된 ‘삼한정벌’과 함께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이 급속히 확산하였다. 정한론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제자이자 메이지 유신 삼 걸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12월 14일 자 일기에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 무례를 묻고 불복할 때는 죄를 따지고 공격하여 그 땅에서 일본의 권위가 신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적었는데 ‘정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한론’을 대조선 정책으로 삼은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교섭을 위한 외교 활동과 함께 조선 침략을 위한 정탐을 시작했다.
1869년 12월 태정관의 내탐 지령을 받은 외무성은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사이토 사까에(齎藤榮)를 출사로 임명하고 조선에 파견하였다. 사다 하쿠보는 『정한평론』(1875)과 『정한론의 구몽담』(1903)의 저자로 대표적인 정한론자다.

1869년 12월 도쿄에서 출발한 사다 일행은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쳐 2월 22일에 부산에 도착해서, 초량의 왜관에 머물며 정탐을 하고 3월에 귀국하였다. 외무성은 사다 등이 조선을 정탐한 결과를 보고했는데, 이 보고서가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이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는 외무성조사부가 편찬한 『대일본외교문서』 (1938.9) 제2권 제3책(131~138쪽)에 실려 있는데, 태정관이 지시한 조사 항목과 조사 목적을 알 수 있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에는 ‘조선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고 예를 갖춘 이유’, ‘조선과 대마도 사신이 왕래할 때 예법’, ‘조선에 입국할 때 허가를 받는 이유’ 등 외교 예법에 관한 사항, ‘무역 시 물품의 교환 및 물가의 고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해․육군의 군사 시설과 장비 실태 그리고 정비 상태’, ‘서울 근해에 순회 할때 항구의 유무’, ‘조선이 러시아에 보호․의뢰하는 소문’ 등도 조사되었는데, 내탐의 목적이 ‘정한’ 즉, 조선 침략을 위한 사전 조사였기 때문이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는 사다 하쿠모, 모리야마 시게루, 사이토 사카에가 연명하였고, 모두 13개 항으로 작성되었다. 독도는 마지막 항목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된 시말>에 수록되어 있다.
(이때는 오늘날과 달리 울릉도를 竹島(다케시마), 독도를 松島(마츠시마)로 불렀다.)

一. 竹島松島朝鮮附屬ニ相成候始末
此儀松島ハ竹島ノ隣島ニチ松島ノ儀ニ付是迄揭載セシ書留モ無之. 竹島ノ儀ニ付テハ元祿度後ハ暫クノ間朝鮮ヨリ居留ノ爲差遣シ置候處當時ハ以前ノ如ク無人ト相成竹木又ハ竹ヨリ太キ葭ヲ産シ人參等自然ニ生シ其餘漁産モ相應ニ有之趣相聞ヘ候事.
右ハ朝鮮事情實地偵索イタシ候大略書面ノ通リニ御座候間一ト先歸府仕候依之件々取調書類繪圖面トモ相添此段申上候以上.

-.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된 시말
"독도는 울릉도와 이웃한 섬으로 독도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남아 있는 서류가 없다. 울릉도 건에 대해서는 겐로쿠(1688~1704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집권했던 시기) 연간 이후 잠시 조선에서 거류를 위해 사람을 보낸 바 있다. 당시에는 이전과 같이 사람이 없었다. 대나무 또는 대나무보다 큰 갈대가 자라고, 인삼 등이 자연적으로 자란다. 그밖에 해산물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가운데 울릉도와 독도부분
외무성 조사부, 1938.9 ,『대일본제국외교문서』 제2권 제3책, pp131~138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의 주석에는 이 내탐서가 『대일본제국외교문서』 제2권 제3책의 574호 문서에 대한 복명서라고 기록되어있는데, 574호는 「조선국 파견원에 대한 조사사항 지령에 관한 질의서와 이에 대한 태정관의 지령」이다.

 메이지 정부의 최고 통치기관인 태정관의 지령으로 외무성이 작성한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김점구(독도수호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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